사례로 보는 토큰 모델 설계(Token Model Design)의 중요성

by | Mar 4, 2019


선생님이 없는 상벌점 제도, 토큰 모델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상벌점 제도’를 겪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서 많이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군대 훈련소에도 있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상점을 주고, 아니면 벌점을 주는 간단한 방식입니다. 이 상점에는 보통 물질적 보상이 연결되어있어 학생들이 바람직한 행동을 할 인센티브가 됩니다.

탈중앙화 네트워크에 토큰이 필요한 이유 또한 비슷합니다. ‘토큰’이라는 상점을 사용해서 네트워크 참여자들(Node)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람직한 행동’은 어떤 블록체인 프로젝트인가에 따라서 ‘거래 기록의 검증’, ‘콘텐츠 제작’, ‘저장 공간의 공유’ 등등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네트워크에 필요한 행동을 했을 때 토큰을 준다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같습니다.

큰 차이점은 바로 탈중앙화 네트워크에는 상벌점을 관리하는 선생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트워크를 관리하는 중앙 주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토큰 모델은 학급에서의 상벌점 제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마치 동등한 위치의 학생들이 모여서 상벌점 제도를 운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죠.

중앙 주체 없이 상벌점 제도(토큰 모델)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어떻게 참여자들이 토큰을 원하게 만들 것인가? (토큰의 가치 Token Value Design)
  • 어떤 행동이 바람직한 행동인가? 각 행동에 대해 얼마의 토큰을 줄 것인가? (인센티브 Incentive Design)
  • 체인 외부에서 발생한 행동, 정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오라클 Oracle)
  • 만약 정한 규칙을 바꿔야 한다면,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 (거버넌스 Governance design)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들이 있을 겁니다. 중앙 주체 없이 유지되는 토큰 모델를 설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토큰이 ‘좋은 인센티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저 질문 중의 하나를 다루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조건인 ‘토큰의 가치 설계’에 대해 알아볼 겁니다.

토큰 모델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기본적으로 토큰이 가치를 가지고, 참여자들이 거기에 반응해야겠죠.

또한 토큰이라는 인센티브의 가치가 전체 네트워크 사용량의 성장과 연동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 네트워크 사용량의 성장과 각 참여자들의 인센티브를 일치시키는 ‘더 좋은’ 인센티브가 될 수 있습니다. 인센티브의 가치가 전체 네트워크의 성장과 연동되어있으면, 토큰을 보유한 참여자들이 네트워크를 성장시키려고 더 좋은 행동을 하고 그 결과 토큰 가치가 더 오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네트워크의 사용량(Network Usage)이란 해당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탈중앙화 네트워크가 제공하고자 하는 서비스의 총사용량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은 돈을 주고받기 위한 서비스이므로 총 거래량, 스팀잇은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한 서비스이므로 콘텐츠의 총 페이지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러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을 보면 ‘토큰의 가치가 네트워크의 사용량과 연동되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시가 총액이 굉장히 높은데도 말이죠.

현재까지 토큰, 코인의 가치는 대부분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래 가치를 믿는 사람이 많은 것과 지불 의사가 있는 서비스의 진짜 사용자들이 많은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토큰의 가치가 네트워크의 사용 가치와 전혀 연동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프로 보는 토큰 가격 결정 메커니즘

네트워크 사용과 토큰 가치가 연동되어 있는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음 2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첫 번째, 네트워크의 사용량과 토큰의 수요가 잘 연동되어 있는가?

네트워크 사용이 성장하는 만큼 토큰 수요도 비례해서 커지는지를 의미합니다.

가운데 그래프의 경우 토큰 수요 증가율이 네트워크 사용의 증가율에 정비례합니다. 그러면 다음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네트워크 사용 증가 -> 토큰 수요 증가 -> 토큰의 가격 상승]이라는 과정을 거쳐 토큰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두 번째, 토큰의 수요가 증가할 때 토큰의 유통량이 늘어나는 데 제한이 있는가?

네트워크 사용량 증가에 따라 토큰 수요가 증가하게 되면, 가격이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응으로 토큰 공급 곡선 또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토큰의 공급 곡선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토큰의 발행량이 증가하거나,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토큰을 시장에 많이, 그리고 빨리 내다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토큰 공급 곡선이 크게 증가하게 되면, 토큰 수요의 증가 효과를 상쇄시켜 가격이 생각만큼 상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장에 유통되는 토큰의 양(Q0 -> Q2)은 늘어나지만, 네트워크의 사용량 증가만큼 토큰 가격이 증가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설계 측면에서 네트워크의 사용량과 토큰 가치의 연동은 1) 네트워크 사용량과 토큰 수요가 잘 연동되어있을수록 2) 토큰 수요가 증가할 때 토큰의 공급 증가가 제한될수록 잘 되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2가지가 지켜지지 않은 토큰 모델 설계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례 1. 리플(Ripple)의 XRP

리플 네트워크는 은행과 금융 기관들이 국제 송금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블록체인입니다. 리플 네트워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외계어 없이 리플 이해하기를 참고해주세요.

최근 바뀐 XRP 로고

그런데 리플의 기초 토큰인 XRP의 설계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리플 네트워크를 사용할 때 굳이 XRP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리플 네트워크에는 게이트웨이라는 것이 있어서, IOU 방식으로 법정화폐(또는 그 외의 어떠한 자산)를 토큰화하여 서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리플 네트워크에 계좌를 개설하는 일회성 등록 비용과, 거래를 발생시킬 때 내는 수수료는 XRP를 써야 합니다. 하지만 리플에 따르면 수수료는 0.00001 XRP (2018년 6월 기준 약 0.006원), 등록 비용은 20 XRP(약 11000원)입니다.

즉, 자발적으로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IOU 대신 XRP로 송금을 주고받지 않는 이상 네트워크의 사용량 증가로 인한 XRP 수요 증가는 미미합니다.

물론 리플 네트워크의 참여자들인 은행과 금융 기관이 모두 XRP로 송금을 주고받으면 상관이 없습니다만, XRP는 암호화폐로써 가격 변동성이 존재하고, 금융 기관들이 암호화폐를 보유하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현재 상황에서 금융 기관들은 XRP를 사용할 유인이 매우 낮습니다.

리플 사도 이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XRP의 사용처를 만들어내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XRP의 현재 시가 총액은 20조 원에 달하고 이 중 절반 이상을 리플 사와 리플 사 관계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리플의 XRP 담당 부서에서는 XRP를 금융 기관에게 뿌려주고 사용을 유도하거나, 리플 네트워크의 고급 기능을 추가하고 XRP로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최근 Xpring이라는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켜 XRP의 사용처를 확장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투자, 지원, 인큐베이팅을 제공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죠.

어찌 되었든 기본적인 설계로만 봤을 때, 리플 네트워크의 사용과 XRP의 수요는 다음 그래프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네트워크의 사용이 토큰의 수요와 잘 연동되어있지 않은 대표적 사례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Quantstamp의 QSP 토큰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2. 골렘(Golem)의 GNT

골렘은 컴퓨팅 파워를 공유할 수 있는 이더리움 기반 탈중앙화 네트워크입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드리면 공급자(Provider)가 유휴 컴퓨팅 파워를 제공하고, 요청자(Requestor)는 일정한 양의 돈을 지불하고 컴퓨팅 파워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컴퓨팅 파워의 에어비앤비 같은 것이죠.

골렘의 기초 토큰인 GNT는 여기서 컴퓨팅 파워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독점적인 수단으로 쓰입니다. 따라서 리플과는 달리 네트워크의 사용량이 토큰의 수요와 잘 연동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GNT는 단순히 결제 수단의 기능만을 가진 토큰으로, 유동량에 대한 제한 기능이 없습니다. 즉, 토큰의 수요가 올라간다고 해서 토큰의 공급량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골렘 네트워크의 공급자들이 보상으로 얻은 GNT를 바로바로 시장에 팔아버리고 GNT 투자자들도 토큰 수요가 올라감에 따라 시장에 자신들의 보유 GNT를 계속 유통시킨다면, 토큰의 유통속도가 증가해서 토큰의 공급 곡선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골렘 팀은 Medium 글에서 GNT의 유통속도가 일정한 상수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가정할 근거가 될만한 유동량 제한 장치는 없어 보입니다. (차후 업데이트나 구현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만 일단 설계 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따라서 토큰 수요가 증가하더라도 토큰 공급이 같이 증가하여 토큰 가치 상승을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토큰 가치가 네트워크 사용량보다 적게 증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토큰의 유통속도는 정말로 예측하기 힘든 것이어서 실제로 서비스가 대중화되었을 때의 데이터를 살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토큰 유통량 증가를 제한할 수 있는 토큰 설계가 필요합니다. 대표적으로 Work token이나 Burn and Mint 패턴 등을 사용하게 되면 토큰 유통량의 증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골렘도 차후에는 이런 방식의 기능을 좀 더 추가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토큰 모델 설계의 중요성

리플과 골렘의 사례를 통해 토큰 모델 설계의 중요성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것 때문에 당장 XRP와 GNT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현재 암호화폐 시장은 사용 가치가 아닌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 (투자 수요)에 의해서 가격이 결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트워크 사용량이 어떻든 얼마든지 수요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직 라이브로 작동하고 있는 블록체인이 많이 없기 때문에 판단할 수 있는 데이터도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보여드린 그래프의 기울기가 어떠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이론적 관점에서 봤을 때에 사례로 들어드린 토큰 모델들이 결코 훌륭한 설계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토큰 가치의 연동은 여러 가지 디자인 패턴을 사용하여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토큰의 디자인 패턴과 관련해서는 이 글을 참고해주세요.

토큰 이코노미의 중요성과 토큰 디자인 패턴(Token Design Pattern)

오히려 중요한 것은 기업가와 투자자들이 네트워크의 사용과 토큰의 가치가 연동되어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몇백, 몇천 억 원의 펀딩이 이루어진다면, 받는 사람이든 해주는 사람이든 이러한 토큰 모델 설계의 중요성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